제 진료실에 고3이 된 여학생이 엄마와 함께 방문했습니다. 더 어렸을 때 술을 자주 마셨던 아빠의 언어 폭력과 괴롭힘이 상처가 돼서, 자신의 모든 삶이 지금도 망쳐지고 있다는 것이었지요. 그 상처로 온종일 화나고 우울하고, 친구 사귀기도 어려우며, 공부도 잘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요즈음 한국에는 소위 ‘힐링’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가슴에 품고 있는 상처들을 치유하자는 것이 그 기본 취지이지요. 이 힐링 열풍을 이해하려면, 좀더 근본적인 한국인의 정서인 한 (恨)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은 한 마디로 상황과 환경에 의해 나는 당하고 어쩔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참고 가슴에 묻어두라고 배우게 되지요. 이렇게 묻어둔 한은 더 커지면 슬픔, 피해의식, 상처, 화병, 우울이 됩니다. 

한은 또한 우리의 생활 방식에 크게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첫째, 당했으니 위로받기를 원합니다. 바로 힐링 열풍이지요. 둘째, 가해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나하고는 관계 없어도 과잉으로 비난을 합니다. 

셋째, 내가 어쩔 수 없으니, 남 또는 절대자에게 지나치게 의존을 합니다. 지도자나 종교, 사대주의 등이지요. 넷째, 과거에 지나치게 매달립니다. 과거가 정리되고 보상되어야 미래로 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과거는 내 기억에 의해서만 존재합니다. 지난 50년 간 한국인의 힘에 보았듯이, 한국인은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민족도 아니지요. 더 이상, 남과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지 않습니다. 

과거를 정리하고, 남과 상황에 의해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것도 필요는 합니다. 그런데 이 치유, 즉 힐링은 달콤하기는 하지만 나의 현재를 고착화하지요. 진통제 같이 원인은 그대로 두고 결과만 치료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 과거, 남, 상황에 더 이상 연연하지 말고, 과연 내가 원하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질문할 때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