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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도스] 한혜원 ‘생명_선' 展
오주영 기자  |  ojy-womandail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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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6.17  08:4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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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엔 가시화되거나 관찰될 수 있는 것이 있는 반면, 원리상이건 현실적으로건 어떻게도 가시화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후자의 것들은 지표적 징후로 주어지거나 가시화된 것들로부터 떠오르기도 하고, 종래에는 우리의 경험 안에서만 직관될 수 있다. 생명, 정신, 가상, 무(無), 그리고 이것들의 양태나 내용 등이 그런 품목들에 속한다. 사실 우리의 느낌의 영역 안에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의식 아래 가라 앉아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비록 모호한 느낌일지라도 우리의 경험과 느낌 안에서 희미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주의 깊은 예술가의 의식과 그들의 예술 언어 안에서 선명하게 포착되기를 고대한다. 물론 이 느낌들 자체와 그들이 포착하고 있는 무수한 사물(事物)들은 표상할 수 있는 대상들로부터 주어질 수 있는 것들이 있지만, 후자의 것들은 전적으로 추상의 형식을 빌릴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한혜원은 십여 년 가까이 제스쳐적 성격이 두드러지는 추상 작업을 통해 생명(삶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의 본성과 그것이 보이는 다양한 비가시적 양태들을 탐구해 왔고, 금번 전시에서도 그 일환에 속한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생명 자체와 같이 표상할 수 없는 것은 가시적 현상을 통해 보이거나 시각적 상징을 통해 직관적으로 사유될 수 있다. 반면, 한혜원이 택한 방법은 생명의 한 본질적 양태를 추상을 통해 포착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포착은 표상적 사유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추상을 경험하는 우리 안에서만 일어난다. 그래서 전통적인 조형 활동과는 거리를 둔 그의 이미지는 관객의 지각과 사유를 동반하지 않는다면 한낱 죽은 형태, 선들의 윤무로 전락할 뿐이다. 이 때문에 그의 작업은 어떤 형태나 형식을 만들 것인가의 고민에서 나온다기보다 오히려 이미지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경험을 하게 할 것인지의 문제로 귀결된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그가 우리의 체험 안에 밀어 넣으려는 것이 불가해한 생명 자체라는 데 있다. 우리는 생명이 있는 무수한 것들을 보고, 그런 종류의 것들만 가진 것으로 여겨지는 속성(예컨대, 창발 속성이나 유기체적 속성)들을 알고 있지만, 한 번도 생명 자체를 본 적은 없다. 생명의 온기를 느낄 수 있지만, 온기는 태양빛에서도 난로에서도 느낄 수 있다. 한혜원은 이 난감한 문제를 회화, 추상, 그리고 제스쳐적 선들로 풀어왔다.  
 그의 작업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건 화면을 가득 채운 균일한 폭(스펀지 브러시에 의한)의 제스쳐적 선들의 군집이다. 이 선들은 단속적 띠들의 패턴형 군집으로 나타나거나, 혹은 마치 지휘자의 연주를 연상시키듯 곡률의 일정한 변주를 만들며 더 긴 호흡으로 주어지는 만곡들, 그리고 이들의 변주와 중첩이 성안해 낸 리듬의 형식들로 주어진다. 안정된 진동의 패턴도 있고, 반면 난류처럼 카오스적인 형태도 있으며, 또 마치 물리학적 의미에서 끌개들의 작용을 연상시키는 힘의 운동과 특정한 경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다만 이들 모두 운동과 리듬을 가시화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띠들은 단일한 개체들로 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이 리듬과 경향성에 이끌리며 하나의 전체로서의 게슈탈트로 지각된다. 그러나 이 게슈탈트가 고정된 형상으로서 주어지기를 포기하고 전체인 운동, 즉 지속(duration) 안에서 느껴진다는 건 그의 작업에 나타나는 매우 중요한 특징이다. 그의 선들은 사물의 가시적 외피나 윤곽을 책임지지도 않으며 공간을 분할하거나 만드는 역할과도 무관하다. 모든 작업에서 보이는 뚜렷한 게슈탈트의 운동은 형태적, 형식적, 공간적 게슈탈트가 아니라 시간의 본성으로서 지속의 게슈탈트를 만든다.
 바로 이점에서 그의 이미지는 현실 공간에서의 선들의 분명한 윤곽에도 불구하고, 되려 가상의 시간, 즉 지속의 시간을 체험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베르그손의 말처럼 생명의 수축 운동은 이것과 저것의 구별을 가능케하는 분명한 윤곽들로 개체적 사물들을 만들지만 반대로 이완은 세계를 분리 불가능한 하나의 역동적 전체로서의 생명, 즉 지속으로서의 실재로 향하는 운동의 경향성이다. 한혜원의 선들은 현실적으로는 선명한 윤곽을 통해 공간에 분할과 윤곽을 제공하면서도 역설적으로 게슈탈트의 운동과 그 리듬의 형식은 가상의 이완 운동을 통해 지속의 체험을 이끌어 낸다. 결국 그의 제스쳐 선들은 시간의 공간화와 반대의 운동, 즉 공간의 시간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업에서 보이는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이미지로부터 기인하는 이 지속의 체험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로 읽혀진다. 대개의 화면은 올오버의 형식을 취하거나 깊이 차원을 만드는 선들의 중첩에 의한 층위를 갖고 있다. 그의 올오버 형식은 폴록과 같은 질적 텍스쳐를 만드는 데 기여하지 않는다.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듯이 선들이 만드는 운동과 리듬은 화면 안에 머물지 않으며, 화면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우리는 그림을 볼 때 이미 그 운동이 무한한 지속의 한 순간임을 감지한다. 선의 운동은 화면의 윤곽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시야 안 현실적 화면은 이미 항상 있었고 앞으로도 지속될 가상의 운동의 한 단면일 뿐이다. 감각적 눈은 캔버스 안에 갇혀 있으나, 가상의 눈은 화면 밖으로부터의 지속과 화면 안의 공간을 동시에 지각한다. 뿐만 아니라, 선들의 중첩 속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층위의 선들이 과거로부터 지속해 왔으며, 미래의 또 다른 층위로 지속해 갈 것임을 느낀다. 그의 작업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현실과 잠재적 가상의 이 이중 운동은 지각, 기억, 물질의 본성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모든 운동하는 것, 생성하는 것, 살아 있는 것, 즉 생명 자체의 본성이다. 화면의 안과 밖, 표피와 깊이, 현실과 가상이 공존하는 지속의 경험을 통해, 우리를 그 지속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 이것이 궁극적으로 한혜원의 작업이 생명을 회화, 추상, 제스쳐 안에서 처리하는 방식이다.
 만약 누군가 한혜원의 작업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고 싶다면, 그는 그의 작업을 화면 안에 가둬두고 고정된 형태로 보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그는 일렁이는 파도에서 파도의 형태만 볼 뿐 파도와 떼려야뗄 수 없는 유동하는 실재로서 바다 전체는 보지 못하는 것이다. 한혜원의 작업을 옳게 보고 싶다면, 그는 분절되고 고정된 가시 세계에 매여 있는 우리의 낡은 관념과 습관적 눈을 잠시 내려놓고, 작가 자신의 제스쳐 행위와 경험, 궁극적으로 유동성, 과정, 지속으로 존재하는 실재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 우리의 눈을 다른 차원에 둘 수 있다면 시선이 멈추는 어느 곳에서도 수축된 개별로서의 부분과 전체로서의 지속과 과정이 함께 보일 것이며, 생명과 우주가 전일적 홀로그램의 차원과 부분적 개체성의 차원으로 이중화되어 있다는 것을 직관하게 될 것이다.
한혜원 ‘생명_선' 展이 6월20일부터 26일까지 갤러리 도스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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