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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담] 이강욱展 '산의 바깥, 바다 너머'
오주영 기자  |  ojy-womandail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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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6.03  12:4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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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욱의 작품에는 식물, 동물, 광물, 하늘과 바다까지 다양한 계가 등장한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삶의 패턴에 유추하자면, 그것들은 일단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어눌한 표현방식 때문에 아이의 순진한 그림이 생각나는 그의 작품은 대상에 대한 정확한 재현에 충실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보고 느낀 바를 전달하는 데는 이상이 없다. 그의 작품을 보면 왜 그림을 배워야 하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그도 미술대학을 다녔지만(그리고 미술대학에 가기 위해 미술학원도 다녔겠지만), 그는 그것을 습득하고 나서 버렸다. 물론 그것은 처음부터 모르는 경우와는 다를 것이다. 또한 그는 박사/작가 못지않은 독서량을 가지고 있지만, 읽고 나서 잊어버린다. 작가에게 작품 이외의 것까지도 많이 기대하곤 하는 미술계에서 우리는 늘 어떤 쓰임새를 생각하지만, 최소한 작업의 경우 그것들이 어떤데 쓰일지 알 수 없는 것들이야 말로 진짜 활용되는 것 아닐까.
지식이든 경험이든 무의식에 쟁여져 있다가 마찬가지로 무의식적인 작업을 통해 나온다. 작업, 특히 전시회를 위한 작업에 전적인 무의식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작업에 무의식이 최대한 발휘되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이강욱의 경우, 그림이 너무 잘 되도 끊어내는 시공간을 가지려고 할 정도이다. 자신을 초기 상태로 만듦(reset)으로서 일종의 관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잘되는 것만 하려하면 작가의 입지는 좁아진다. 장인(생산자)은 하나만 잘 해도 되지만, 예술가는 전 방위적이다. 계속 이동 중인 예술가는 무엇인가 익숙해질 틈이 없다. 이강욱은 ‘refresh’를 말하지만, 기계적 일상에서 그렇게 신선한 전환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그가 직면했던 세계는 영감의 근원이 된다. 그의 말대로 ‘바람 한 점, 풀 한 포기’에서 얻는 영감은 매우 크고, 그것은 작품에 잘 반영되어 있다. 이전 전시에서 ‘풀 한 포기’ 얽힌 상상력이 피어났다면, ‘바람 한 점’은 이동하는 동물들이 등장하는 이번 전시에서 발견된다.

 [산의 바깥, 바다 너머]라는 부제로 열리는 이번 전시에는 바람처럼 나타났다 바람처럼 사라질 법한 이상한 동물들이 등장한다. 작가의 삶에서 작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지만, 그의 작품은 세상과 절연하고 작업실에 푹 처박혀 만들어졌을 법한 통풍이 안 되는 스타일의 작품과는 거리가 있다. 대개 평평하게 채워진 바탕에는 대상을 감쌌던 공기, 즉 분위기가 전달된다. 그 분위기 속에서 그 안의 것들도 같이 숨 쉰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지속되는 맥락이지, 어떤 특별한 국면의 단편은 아니다. 움직이지 않는 그림은 단편이지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굳어진 파편이 아니라, 생략된 앞뒤의 함축을 통한 일련의 서사를 가진다. 밤을 표현하기 위해 켜켜이 칠해진 화면의 층이 밤의 깊이를 전달하며, 바다를 표현하기 위해 쓱쓱 그은 선들은 바다 한가운데 자리한 산(또는 섬)이 바다와 함께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 해왔는지 알려준다. 간략한 선과 형태가 특징인 작품에는 점, 선, 면의 변주인 조형 언어가 적재적소에 구사되고 있다.
간략한 표현방식이 특징인 그의 작품에서 형식은 큰 위상을 차지하지만, 그것은 예술 언어의 자족성을 위해 세계를 괄호 치는 형식주의와는 구별된다. 작품은 작가가 본 것을 보여주지만, 그는 세계의 별천지를 돌아다니는 탐험가 스타일은 아니다. SNS를 통한 소통방식처럼 자기만 해봤던 것을 같이 보자고 소개하지 않는다. 그러한 소재주의는 다른 상품들의 목록처럼 그냥 우리를 스쳐 지나갈 뿐이다. 작가 또한 다른 사람들처럼 그런 별천지들을 향유하고 싶겠지만, 작업은 또 다른 차원이다. 작업의 지속을 위해서는 스스로 설정한 엄격한 규칙이 필수적이다. 삶을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와 물질을 온전히 작업으로 전용하는 이에게 자유로움은 규칙 실행에 있어서 창의적인 수의 적용에 집중된다. 작업에 묶여 있는 작가는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새로움, 또는 특별한 것을 보여주는 것일까. 작가는 예술에 대해 ‘그 시간을 온전히 내 시간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작가는 작업을 통해 작품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그림 안의 공기와 색감에 빠진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가지는 체험을 한 적이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림 안에서 바라보는 것을 그 안에서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김홍도의 작품 속 서슬 퍼런 호랑이에서 그러한 경지를 본다. ‘그림 속으로 사라진 작가’라는 멋진 문구가 붙은 반 고흐에 대한 책 소개도 떠오른다. 작가가 그림 속에 들어 갈 수 있어야 다른 사람들(관객)도 그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것 아닌가. 온갖 화려한 스펙터클이 대중의 눈을 현혹하는 가운데, 예술은 이러한 내재적 차원을 통해 자신의 차별성을 내세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날이 발전하는 가상현실을 비롯한 대중문화 또한 몰입을 겨냥하지만, 대량 소비에 맞춰진 생산과정에서 몰입은 없다. 거기에는 최대한의 이익을 위한 철저한 계산에 의거한 합리적 과정이 있을 따름이다.

내가 만든 세계지만 거기에서 또 다른 나, 즉 다양한 타자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작품에 들락날락 할 수 있는 사람, 즉 예술가의 특권일 것이다. 작가는 그림을 통해 뻔한 일상을 탈출한다. 예술이라는 또 다른 차원을 통해 일상의 다른 결을 발견한다. 이강욱의 경우 우리도 같이 볼 수 있는 어떤 대상의 표면이 아니라, 그 대상이 되는 것에 있다. 카프카적인 변신은 오늘날 겉보기의 자유로움 뒤에 더욱 결정론적 작용하는 시스템화 된 현대사회를 탈주하는 작가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소수가 다수가 되어 집단적(정치적)인 해결책을 추구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탈주는 산 넘고 바다 건너, 그리고 창공을 통과해 우주까지도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대개 제자리에서 하는 탈주이다. 변신은 굳이 탈주라는 것을 멀리까지 가야 하는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변신을 통해 현실 속 작은 틈도 빠져나갈 수 있는 문턱이 될 수 있다.

질 들뢰즈로 대표되는 현대적 사고가 총체적 질서를 전제하는 유기체보다는 단편을 지지하는 것은 탈주를 염두에 둔 것이다. 단편들의 조합은 거대 시스템의 틈을 빠져나가는 유력한 방식 중의 하나이다. 그때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접합하기 위한 단면을 가지는 단편이 아니라 파편 그자체가 되는 것, 또는 전체의 일부로 톱니바퀴같이 작용하는 부품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단편과 단편이 난데없이 이어지곤 하는 이강욱의 작품은 탈주를 위한 변신의 한 방식이다. 변신하는 존재는 대지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나무같이 체계적이지 않다. 그것은 풀과 더 가깝다. 풀의 뿌리는 지층 바로 아래에서 서로 얽혀있다. 식물과 식물이 자라는 축소화된 대지라 할 수 있는 화분이 있는 풍경은 제자리에서 변신한다. 작품 [7개의 씨앗]에서 화분에서 나오는 줄기와 그 위에 걸쳐있는 ‘가지들’은 말 그대로 난데없는 관계로 이어진다.

가지 끝에는 꽃, 하얀 점, 뭉게구름 같은 것들이 ‘7개의 씨앗’에서 발생한 것일 터이다. 노란 점박이 배경은 이러한 예측 불가능한 변신에 경쾌함을 더한다. 작품 [파초]에서 하얀 작은 원, 그 위에 다이아몬드 형태, 그 위에 식물같은 형태들이 아슬아슬하게 연결된다. 이어진 것들이 서커스처럼 균형 잡는 가운데 노란 꽃은 마치 얼굴처럼 보인다. 아니 얼굴 자리에 위치한다. 봉오리는 표면 아래에 무엇인가를 숨긴다. 작은 하얀 동그라미 위에 쌓인 것들은 근거 없는 연결망들의 뿌리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자라나는 생명체의 기적 같은 존재 방식을 알려준다. 작품 [어디 빛나는]은 ‘마치 형광 식물같이 깊은 밤 스스로 빛나는 식물’이다. 이 스스로 빛나는 존재는 지하의 뿌리 얼개까지 다 보여준다. 작품 [붉은 나무 새]는 새가 나무가 되고. 그 나무 위에 새가 있고, 가지 끝의 검은 원들에서 또 무언가가 자라난다. 검은 원은 점을 닮았지만, 그의 작업은 점에서 점으로 이동하는 좌표적 사고가 아니라, 비스듬한 선으로 종횡무진 움직인다.

광합성을 위해 하늘을 향해 일사불란하게 뻗은 가지가 아니라 제멋대로의 가지, 한 종류의 열매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나오는 씨앗, 뿌리의 취약함-그것들은 대개 약간의 표시로만 존재한다-은 이강욱의 작품 속 식물적 존재 양태의 특징이다. 그것은 씨앗에서 또 다른 씨앗을 낳는 과정에 존재하는 식물적 변신의 여러 단계들과 유사하다. 식물의 이동은 제한적이어서 주로 변신을 통해 ‘이동’하지만, 동물은 실제로 이동할 수 있다. 식물은 동물의 이동성을 이용하면서 진화해왔다. 지구상의 최초의 생명체였던 식물은 자족 기능을 갖추고 이후의 생명체들을 가능하게 한 원초적인 존재이기에 배경이 따로 필요 없지만, 동물은 그렇지 않다. 동물은 종속 생물체인 것이다. 작품 속 동물은 식물과 달리 배경을 가진다. 산은 호랑이에 딸려온 세트처럼 보인다. 작품 [산을 넘는 호랑이]에서 붉은 바탕에 시늉으로만 그려 넣은 듯한 작은 산은 호랑이를 매우 거대한, 그래서 신화적 존재처럼 보이게 한다.

이강욱展  '산의 바깥, 바다 너머'가 6월5일부터 17일까지 갤러리 담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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